성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성탄의 기쁨과 감격 이전에 말할 수 없는 신비와 경외감에 압도됩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향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주는 교훈, 즉 말할 수 없는 겸손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이 짧은 말씀 속에 복음의 신비가 용해돼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이 놀라운 표현입니다. 6절의 ‘종의 형체를 가져’에서 ‘형체’라는 말도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원문은 동일한 말인데 아주 특별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체이다’ 혹은 ‘본체가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사람의 본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흉내를 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사실을 인간의 머리에 담기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을 창조하신 이가 어떻게 사람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작은 세포덩어리가 되어서 사람의 몸을 통해서 나오실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진리라고 선언합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받으며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진리는 말 그대로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이 진리를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이 진리 앞에 충격을 받고 그 사랑 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우리의 왕께 무릎을 꿇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난의 신비를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다시 한번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안에 바로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선포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진리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긴장과 갈등이 있는 교회를 살리는 사람은 이 진리에 붙들린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복된 성탄의 날, 우리는 다시금 이 신비와 영광의 진리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의미 없이 들떠 있고, 여전히 이 엄청난 진리를 외면하며 각기 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 기쁜 날에 우리는 다시금 이 위대한 진리 앞으로 돌아와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감격과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통성기도------나라, 교회, 목사님,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합시다-----다같이 주기도문--------------------------------------------------------다같이
◎ 하나님,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 성탄절에 우리가 다시금 영광스럽고 신비스러운 성육신의 진리로 돌아가서 겸손하게 하시고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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